[지역:사람들] interview 01

2대째 가업을 이어나가는 ‘유이석

<글 황진영>

내 고향 정선, 삶의 터전이자 꿈의 무대

2대쨰 가업을 이어가는 유이석(45) 기능장

[아버지의 손을 닮아가는 삶]

하루에 두 번씩 닦아도 방바닥을 슥 쓸면 탄가루가 새카맣게 묻어났다. 그래도 사북사람이라면 다들 그러려니 했기에 대수롭지 않았다. 유능한 기술자인 아버지는 이른 새벽부터 공업소로 손님들이 찾아오는 바람에 별보며 출근하기 일쑤였다. ‘너는 기름쟁이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에 아들은 상고로 진학했다. 탄광이 문을 닫자 방바닥은 몰라보게 깨끗해졌지만 대신 아버지의 한숨이 날로 깊어졌다. 아들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좋았다. 어깨너머 바라보았던 익숙한 풍경들이 어느새 아들의 일상이 되었다. 유이석(45) 씨는 오늘도 자랑스러운 ‘기름때’를 인생에 새기며 살아간다. “상고를 나왔어요. 93년도에 졸업을 했는데, 그 때가 폐광시기하고 맞물려요. 졸업 후에 6개월 동안 농협에 다녔어요. 당시에 아버지께서 광업소에서 중장비 고치는 일을 하셨는데, 폐광이 되고 일감이 떨어지니까 답이 안 나오는 거죠. 아버지께서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뵈니까,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어릴 때부터 봐왔던 공구들도 너무나 익숙하고, 프라모델이나 디오라마도 만들만큼 손재주도 나쁘지 않았어요.”

공부는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구나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학교나 학원도 너무 멀리 있었다. 그래도 어린 시절부터 틈틈이 접해본 경험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일을 하다보면 유 씨는 종종 아버지 생각이 나곤 한다. 예전과는 환경이 너무도 달라졌다. 발전기나 모터를 모두 분해해서 수리를 하던 그 때 그 시절과 달리 지금은 보다 정밀하고 정확한 확인을 위해 기계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예전에는 발전기나 모터를 다 분해해서 수리를 했어요. 지금은 몸이 좀 안 좋으신데. 가끔 아버지께서 한 쪽에 담배 하나 무시고 일하시던 모습이 떠오르죠. 발전기 고장 나고 이런 거 보면. 새벽 5-6시에 스타터 모터나 이런 걸 조립하면 그 추운 날에 차 밑에 들어가서 일을 하시곤 했어요.”

기술기능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최상급 숙련기능을 가진 사람들이 기능장을 취득한다. 유 씨도 2006년도에 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했다. 새로운 고장증상을 마주했을 때마다 유 씨는 여전히 즐겁다. “형사가 범죄자 찾을 때처럼, 수학문제를 풀어내는 것처럼 재미있어요. 다른 카센터에서 도와달라고 연락이 종종 오거든요. 다른 분들은 못 찾는 걸 제가 찾아냈을 때 가장 좋죠.”

유 씨는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재능을 다시 아들에게로 물려주고 싶다. 다만 예전처럼 기술만이 최고인 시대가 아님을 잘 알기에 만일 자녀가 가업을 잇게 된다면 조금 더 많은 공부를 하도록 지원해줄 생각이다. “만약 아이가 뜻이 있다면 정비 기술 외에도 경영이나 마케팅 관련 공부까지 할 수 있도록 할 거예요. 저는 그게 조금 아쉽거든요. 스스로에게. 첫째보단 둘째가 이쪽 일에 적성이 맞지 않나 싶어요. 큰 놈은 문과스타일이고 작은 놈은 이과스타일이거든요. 아직 크는 시기라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다시 아들에게서 손자로. 어쩌면 3대까지 이어질지도 모를 ‘오래된 미래’를 이야기하는 유 씨의 눈이 반짝였다.
대를 이어 일을 물려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유 씨에게 정비는 현재진행형이다. 일을 지속하기 위해 함께 발을 맞춰나갈 후배들이 꼭 필요하지만 좀처럼 쉽지 않다. “사람들이 선입견이 있어요. 지금 월급 그거 받아서 뭐하냐는 식이죠. 앞으로 정비인력이 부족하게 될 거예요. 지금 배워놓으면 좋아요. 지자체 차원에서 기술인력을 양성하면서 월급 보조를 해준다든지 이런 지원이 있으면 참 좋겠어요.”

[더 살기 좋은 정선이 되려면]

예나 지금이나 유 씨에게 정선은 참 살기 좋은 곳이다. 나고 자란 곳이니 당연한 얘기겠지만 정선 어디를 가도 온통 추억이 쏟아진다. “우리집이 동원탄좌 사택을 지나는 길목에 있었어요. ‘안경다리’ 밑이라고 했거든요. 거기 있으면 지금도 기억하는 게, 아침에 방을 닦으면 새카매요. 탄이 날아와서. 저녁에 방을 닦아도 새카매요. 정말로 검정색이었어요. 사북이 오묘해요. 계곡도 있고 산도 있고 그래서 살기엔 너무 좋아요. 친구들하고 방학 때 야영도 가고. 그 지역 토박이 친구들하고 한 번 싸우기도 하고. (웃음) 싸웠어도 다음번에 만나면 친해져서 같이 고기도 잡고 그랬거든요. 옛날에는 정이 많았죠. 지금은 우리 큰 놈 보니까 그런 걸 잘 모르겠어요. 우리 땐 텐트 하나 가져가서 무작정 놀러가고 그랬어요.”

‘폐광지역 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위해 사북이 온통 들끓던 90년대 초중반, 공부를 위해 잠시 떠났던 유 씨는 고향에 다시 돌아왔다. “제가 사북 왔을 때 ‘3·3투쟁’이 한창이었어요. 그 때 저도 참가했거든요. 제가 사북으로 와서 얼마 안돼서. 광업소가 다 문을 닫고 사람들이 빠져나갈 시기예요. 그럼 대체산업이 있어야 사람들이 살 거 아니에요.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부터 경기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운이 조금 없는 세대죠.”

부침이 많을수록 고향에 대한 애착은 높아졌다. 더 좋은 삶을 위해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유 씨는 사북을 떠날 수 없었다. 일종의 사명감도 작용했다. “제가 기능장을 딸 때만 해도 굉장히 귀했거든요. 나가려면 나갈 수는 있지만 또 나 같은 사람이 없으면 또 태백이나 인근에 뺏기는 일도 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거는 조금 싫어요. 지역에 다 선후배고 형들인데. 일단 그리고 제가 여기가 너무 좋아요.”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정선의 모습은 꽤나 단편적이다. 오지벽촌의 생활이 아니면 카지노만을 주목한다. 그러나 유 씨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다채로운 고장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첩첩산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죠. 한 시간 이내에 모든 걸 다 할 수 있거든요. 강릉도 갈 수 있고 제천, 원주도 갈 수 있어요. 오지 아니면 카지노로만 비춰지는데 그게 다는 아니죠. 뭐든 즐기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카지노뿐만 아니라 워터파크도 있고. 캠핑장도 많고요. 처음 거래하는 업체랑 통화할 때 사북이라고 하면 모르고 정선 카지노라고 하면 알아요. 그게 조금 씁쓸해요. 정말 살기 좋은 곳이에요.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어요.”

그러나 미래를 생각하면 유 씨에게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폐광 이후 참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 중 가장 많이 바뀐 것이 사람이다. “장사하시는 분들이 마음이 다 똑같을 거예요. 사실은 바닥인구가 있어야 하거든요. 바닥인구가 없어요. 뜨내기 손님들로는 의미가 없어서 그게 사실 고민이에요. 토박이에게도, 이주해온 사람에게도 생업을 영위하기 위한 자원이 부족한 편이다. ‘폐광지역개발지원에 관한 특별법(이하 폐특법)’의 만료 시점을 목전에 둔 시기이기에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더 변화할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출신지가 어디든 살고 있는 곳이 정선이라면 함께 연대해야 한다고 유 씨는 말한다. “많은 분들이 타지에서 오셨어요. 지역 토박이는 30%밖에 안 될 거예요. 사실 지금 조금 위험하거든요. 폐특법 때문에. 그걸 잘 극복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잖아요.”

[뷰파인더 속 또 다른 이야기]

유 씨에겐 남다른 취미가 있다. 바로 영상이다. 그는 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고등학교 때부터 수집해온 DVD만 해도 어림잡아 5-600장은 넘는다. 적성을 살려 유 씨는 지난해부터 강원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주관하는 ‘방방곡곡마을미디어’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역의 청소년들과 영상작업을 진행해왔다. “사북에 ‘별꼴야시장’이라는 곳이 있어요. 홍보영상도 만들고 해서 고한시네마에서 상영회를 가졌어요. 그래서 학교 선생님들, 학부모님들이 오셔서 보시고 되게 좋아하셨죠.”

유 씨에게 정선이 고향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정선은 신기할 정도로 그에게 많은 걸 내주는 고장이다. 영상 관련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마음을 먹자 다양한 경로로 기회가 쏟아졌다. 덕분에 지난 몇 년 간의 활동을 통해 시나리오, 촬영, 편집까지 모든 걸 다 해내는 전천후 제작자로 거듭났다. “영화는 감독의 생각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거잖아요. 제 생각을 다른 사람들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거든요. 제가 운이 좋은 건지, 알고 지내던 목사님이 시나리오 하시는 분을 데리고 온다고 하더라고요. 일주일에 한 번씩 시나리오 수업을 받았어요. 사람이 욕심이 생기잖아요. 그러던 차에 강원시청자미디어센터에서 ‘방방곡곡 마을미디어’를 한다고 하더라고요. 기자재를 빌려준다고 하더라고요. 교육도 시켜주고. 그러면 다 되는 거 아니에요. 찾으면 길이 보이더라고요.”

일상생활이 40이라면 취미생활이 60이라며 멋쩍게 웃음 짓는 유이석 씨에게 요즘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생겼다. 지역에 스튜디오를 만드는 것이다. 활동을 통해 아이들이 생각보다 갈 곳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누구든 마음껏 자신만의 창작물을 만드는 공간을 언젠가 만들어보고 싶다. “사북에 있는 아이들이 갈 데가 없어요. 그래봐야 피씨방이나 장학센터예요. 놀데가 없어요. 제가 만들 스튜디오가 낮에는 예약제로 어른들이 쓸 수 있게 하고 하교 후에는 아이들이 쓰고 야간에는 동아리 활동을 하는 전천후공간으로 활용 됐으면 좋겠어요.”

꿈을 이야기하는 유이석 씨의 표정에서 언뜻 소년이 스친다.

그는 오늘도 믿음직한 기술자로, 다정한 지역의 선배로, 씩씩한 창작자로 살아간다. 사랑하는 삶의 터전이자 꿈의 무대인 정선에서.

대한밧데리카정비센터 / 강원 정선군 남면 문은단로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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